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세르비아 침공]] ===== [[7월 29일]] 다음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군함들이 [[도나우강]]을 타고 올라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했고,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포병대장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2군, 제4군, 제6군은 [[사바강]]과 드리나강을 도하할 준비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군은 45만 명의 병력과 엉성한 훈련을 받은 몬테네그로인 보조병들만을 갖추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국군 총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 원수는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세르비아 병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 각오를 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불가리아 왕국에 이르는 45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지켜야 했던 푸트니크는 휘하의 3개 군을 세르비아 중부 지역에 배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불가리아 왕국]] 어느 쪽이 침공해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했다. 푸트니크는 소수의 병력으로 주요 하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가 오헝군의 주요 도하 지점을 포착한 후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전략을 집중해 제국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짰다. 푸트니크가 정확하게 오헝군의 주공 방향을 예측한 덕분에 오헝 제국군이 실제로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왔을 때 세르비아군은 이를 맞아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반면, [[오스카르 포티오레크|포티오레크]]의 전략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동포 슬라브인 세르비아군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당시 군기가 해이해져 있던 제국군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제2군도 투입할 생각이었지만, 당시 제2군은 세르비아 공격을 위해 발칸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시점에서 콘라트는 제2군이 세르비아 전선으로 빠짐으로써 갈리치아 일대가 취약해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7월 30일]], 콘라트는 다시 제2군을 갈리치아로 되돌리라고 명령했지만, 철도 이용량의 폭주로 인해 제2군의 복귀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제2군이 삼보르(Sambor) 동쪽의 방어선에 자리를 잡은 것은 8월 25일이 되어서였다. [[8월 1일]],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8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양면전쟁]]을 공식화했는데, 전반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암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탈리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여전히 중립이었다. 레들리히는 8월 첫째 주에 콘라트가 확실히 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8월 4일]] 레들리히는 이를 회상할때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콘라트을 만났을 당시 콘라트의 상태가 차분하게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진행되고 있었다. 펼쳐진 철도 문제는 실망스러웠지만 수백 대의 기관차가 하루마다 평균적으로 7,000명의 병력과 보급품을 전선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독일계, 헝가리계, 슬라브계 가릴것없이 남성은 [[프란츠 요제프 1세|황제]]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앞다투어 입대를 하였고, 이는 진정으로 콘라트를 놀라게했다. [[8월 12일]], 세르비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9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세르비아군은 자다르 전투에서 오헝 제국군을 공격개시선으로 밀어내버리면서 퇴각하는 오헝군을 쫓아 보스니아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헝 제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도 결의에 찬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9월 7일, [[오스카르 포티오레크|포티오레크]]는 다시 한 번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너무 멀리 진출해 나온 세르비아군을 보스니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세르비아군은 11월 29일, 어쩔 수 없이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내주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질서정연하게 남서부 방면으로의 철수작전을 끝마친 푸트니크는 콜루바라강에서 반격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페타르 1세는 소총과 50발의 실탄을 지니고 최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독기 어린 세르비아군의 반격에 제국군은 다시 한 번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12월 15일 무렵, 세르비아군 정찰대가 다시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입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세 번째 침공 역시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콜루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27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133문의 야포까지 잃었으며 거듭된 졸전의 책임자였던 [[오스카르 포티오레크|포티오레크]]는 결국 [[오이겐 폰 외스터라이히테셴|오이겐 대공]]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국군은 전황이 급박해진 [[동부전선]]에 주의를 돌리면서 세르비아 전선은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다. [[1915년]] 여름 동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는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